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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는 노래*

김미정(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어떤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한 소설가가 ‘짜증난다’라는 말로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려는(소위 ‘퉁치려는’) 사람들의 최근 언어 습관에 대한 염려를 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쓸 때 그 단어를 쓰지 않도록 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채 그저 “짜증나”라는 말로, 모든 것이 정리된 줄 아는 일시적인 기분을 경험하신 바 있을 거라 추측합니다. 물론 저도 그런 적이 꽤 많습니다. 시간을 들인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 마음과는 달리 다른 말이 튀어나오더라고요. 사실 그 말은 꽤 다층적으로 여러 상황에 적용될 수 있어 편리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말을 자꾸만 사용하게 되는 건 그 복잡한 마음을 인정받기 어려운 동시에 얼른 정리되기를 요구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감정의 기원과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이해받는지 알지 못한 채 말이지요. 

 근래 MBTI 등의 성격 테스트가, 서로를 이해하는 매개로서 유용하다고는 하지만 어디 성향과 성격이 그리 쉽게 ‘분류’가 될까요. 결국 나를 충실히 설명할 수 없을 때, 즉 어떤 언어도 이 감정을 서술할 수 없을 때, 무기력을 동반한 쓸쓸함과 우울함이 온몸에 순식간에 퍼져 버릴 때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소설가는 그 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관조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그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마주하는 건 참으로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혹은 당신‘들’은 그 멜랑콜리한 풍경에 아예 몸을 담가 버립니다. 더 나아가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힘겹게, 그럼에도 끊임없이 말하려 애씁니다. 자신을 대면하는 건 언제나 끔찍한 일이고 당신 또한 종종 그 고통에 잠식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당신은 그것을 인정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당신의 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는지요. 당신은 정말 큰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이 정면을 향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 명의 당신의 눈이 여러 곳을 향하고 있는 것 외에, 눈을 통해 직접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지양하는 듯 보입니다. 당신의 눈처럼 당신은 아주 정적으로 보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작가이다>(2019)에서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가로로 긴 화면으로, 여러 명의 파랗고 검은 당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나는 그냥 그림을 그린다. Je peins juste”라는 말이 참 당신답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 가 아니라 ‘그냥’을 덧붙이는 당신의 머뭇거림에서 말이지요. ‘그냥’과 ‘그린다’ 사이에서 발화자이자 창작자로서의 당신의 고민이 발견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제목을 통해 자신이 창작자임을 잊지 않고 오히려 강조합니다. 즉 그 말을 불어와 영어로 두 번 적음으로써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왜 하는지를 단호히 상기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 다른 쪽의 당신은 입을 손으로 가리기도 해요. 혹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장면도 꽤 많습니다. <나의 푸른 시대>(2016)에서 당신은 자신의 손을 커다랗고 슬픈 눈(하지만 단순히 슬프다고 정의하기도 어려운)으로 응시합니다. 그러고 보니, 신체의 부분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상태가 짐작됩니다. <여름일기>(2024)에서 손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네요. 손은 지시하거나, 잡거나 하는 직접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여러 모양을 만들면서 감정의 제스처로 기능할 수도 있지요. 어쩌면 그림 속 손들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당신의 손 앞에 놓인 대상을 알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그 손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이/것을 염원하는 건 아닐지 가늠해 봅니다. 

 반면 손과 눈에 비해 당신의 표정이 담담해 보이는 건 당신의 간결한 입매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입으로 꽤 많은 일을 합니다. 당신은 담배를 입에 물 때도 있고 입에서 무언가를 내뱉기도 해요. 그게 담배 연기인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내는 말풍선인지 혹은 그 둘 모두에 해당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여린 연기 같은 걸 봅니다. 선도, 면도 아닌 형태로 흘러가듯 누군가를 에워싸기도 하고(<자신만을 위한 진실>, 2021) 상대를 연결하거나(<작은 생각들>, 2019) <Insomnia Dream>(2022)에서는 스스로를 감싸 안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내뱉는 그것들이 연기의 성격이라면 그건 닿는 동시에 스러지는 재질이겠지요. 그럼에도 당신은 계속 무언가를 내뱉어요. <I'm wrong>의 담배 연기와 <나는 틀렸었지>의 그것도 그러합니다. 이 둘은 같은 맥락의 제목으로 보이고, 두 작품의 인물들 모두 입에서 무언가를 내뿜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틀렸었지>의 입술 사이에서 뿜어지는 그 덩어리는 상대를 어떻게든 돌려 세우려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건 단순히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성질의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보았을 때 과연 당신이 그저 멜랑콜리의 상태를 관조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당신이 결국 연결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에는 늘 불안과 그리움, 고독과 ‘위대한 혼자’가 공존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은 자신이 마주한 감정의 켜를 펼쳐내는 데 집중합니다. 가로나 세로 형태를 지닌 긴 화면 안에서 만화의 칸처럼 서사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며 당신은 ‘멈추지 않는 관념의 연속성** 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공간 사이사이에 분절된 신체들, 예를 들면 (당신으로 추측되는)하이힐을 신은 발이나 앞서 언급했던 ‘말하는 손’등이 채워집니다. <여름일기>에는 당신이 선호하는 예술가들이 누군지도 발견할 수 있네요. 사실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이 당신을 이해하는 데 유연한 흐름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그건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니기도 합니다. 당신은 자신을 구성하는 혹은 꿈꾸게 하는 그 불완전한 것들을 통해 스스로를 제3자의 시선으로 살피고 이 심연을 끝까지 들여다봅니다. 

 아니 에르노의 『그들의 말 혹은 침묵』(2022)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가끔 내게 비밀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비밀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구가 없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니까.” 처음에 저는 이 문장이 당신을 꼭 닮아있다고 생각했어요. 표면적으로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그럼에도 늘 ‘쏟아내려’ 합니다. 도리어 “저는 당신에게 말하라고 요구하지 않아요. 들으세요, 단지 들으세요.”***라고 건네고 싶은 건 아닐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감히 알지 못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그 개개의 사건을 파악하는 게 그리 중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그 이후의 자신을 어떻게 말할지를 찾는 중이니까요. 때문에 당신은 필요하다면 캔버스라는 지지대를 넘어 텍스트와 설치 등을 오가며 자신의 서사를 지지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섭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당신은 우울로부터 후퇴하거나 철회하는 대신 하염없이 일기를 써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일기를 읽는 이들의, 또 다른 심연의 언어가 덧붙여지기를 고대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작가이다>의 오른쪽 하단에, 갑자기 화면 밖을 향해 달려 나가는 또 다른 당신을 봅니다. 여전히 거기서 구체적인 표정을 읽지는 못했지만 저는 어딘가를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위 하는 당신을 발견했다는 게 반가웠습니다. 처음으로 당신이 정말 말하려는, 말하고 싶은 존재라는 걸 확신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이름이나 몸짓을 빌린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쏟아 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과연 어디를 향할 것인지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슬프게도/어쩔 수 없이 점점 불확실한 세계의 일원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그렇기에 사람들은 모든 게 명확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통해 알게 된 건, 삶의 층위들은 해설이 불가할 정도로 난해하고 까탈스러운 것이며 그렇기에 그의 진짜 이름을 들여다봐야 하는 일에 더 시간을 쏟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그 이상의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면 첫 마디는 무엇일까요. 당신의 이름이 과연 키키인지, 혹은 다른 이름인지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록 정리되지 않는 어수선한 내레이션이라도, 당신은 키키이자 화가이자 혹은 일기를 쓰는 사람으로서, 당신만이 지을 수 있는 노래를 멈추지 않을 것임은 확신합니다.  

*본 글의 제목은 서정배 작가의 작품 <쉬지 않는 노래>(2018)에서 차용하였으며 이 작품에는 'Don't worry'와 ‘I'm wrong'이 각 두 번 적혀 있다.  

**작가노트에서 참고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박준상 역, 그린비, 2009,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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