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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해서 '위대한 혼자'
김유빈_고양시청 문화예술과 큐레이터


서정배는 매 순간 흘러가는 감정을 글로 옮긴다. 또 그는 그 글에서 채집한 분위기를 작품으로 표현하여 세상에 말을건넨다. 그렇게 형상화된 분위기는 지극히 쓸쓸해서 보는 이의 내면에서 그 감정의 근원을 좇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일으킨다. '무엇이 이토록 쓸쓸할까?' 서정배의 회화, 드로잉, 설치미술, 애니메이션 같은 시각예술 작품은 언제나 묘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마치 내면에 수수께끼를 품은 채, 보는 이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다. 특히 얼굴과 몸을 가리는 캐릭터가 평면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몸짓은 누군가의 관심과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인 듯하다. 그러나 그런 불안함을 심드렁한 태도로 애써 감추려는 듯한 모습에 더 마음이 쓰인다.

'키키'를 온통 둘러싼 불안은 보편적인 감정이기에 우리는 서정배가 만든 가상의 캐릭터, ‘키키’의 감수성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내가 수년간 키키에게 마음을 쏟는 이유 또한 그러한 공감에 있다. 나는 그녀의 독백이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반가웠다. 불안함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키키에게 역설적으로 종종 모종의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서정배의 글 모음이자 키키의 일기인 <검은 담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또 그림의 배경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키키는 우리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어른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나를 안심하게 한다. 만약 키키가 드러내는 불안감이나 상실감이 파괴적이거나 강한 전복 의지를 담고 있다면 서정배의 작품에서 안도감을 얻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작가도 아닌 키키라는 제3의 인물이 지니는 감정을 독자 또는 관람자로서 내가 집요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키키와의 인연을 과거부터 시간순으로 되짚어 보았다.

내가 키키를 처음 만난 2017년, 그녀는 붉은빛 세상에 담겨 있었다. 그때 그녀는 “꿈이 있다(I have a dream)”고 단언했다.(1) 서울을 떠난 키키의 마음은 설렛고 해마다 거듭 찾아오는 봄을 오롯이 감각했다. 키키는 새로운 곳에서
익숙함을 찾았다. 그녀에게는 기다릴 대상도 있었다. 그 뒤 키키는 “괜찮아(I am fine)” / “난 틀렸어(I am wrong, I am wrong)”. (2) 라는 상극의 말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시기와 “창작은 가치 없고 쓸모없는 것”(3)이라는 자조를 시기를 보냈다. 2021년부터 키키는 점차 푸른 빛 세상에 둘러싸였다. 이전의 붉은 작품들에서 키키의 방어 의지가 엿보였다면 파란 세상 속의 키키는 무기력해 보인다. 이는 마치 어둠 속에 꼭꼭 숨기고 싶은 나의 못난 구석이 자꾸만 의식으로 번져 나오는 상황을 떠올리게 하여 나를 불편하게한다. 이에 나는 파랑을 ‘외경심’으로 이해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말에(4) 위로를 받는다. 나는 파란빛에 둘러싸인 키키의 무력함을 두려움과 공경심이 혼재하는 상태라고 헤아리고 싶다. 더 나아가 무력함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뻔뻔하게 드러냄으로써 온전한 불안이 무기력을 제압하게 한 키키의 태도에 주목한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도 좋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으니깐.'
'무엇을 기대하지 않아도 좋다. 기대할 것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깐.'
......
'채울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온전하고, 완전한' 나의 모습 그대로.' (검은담즙 #34)

키키의 불안이 서정배 회화와 드로잉의 색채에서 일차적으로 포착된다면, 키키의 일기 모음집인 「검은 담즙」은 그것의 서사로 작동하여 독자가 키키의 불안에 더욱 공감하도록 돕는다. 우리는 우선 그림에서 알게 된 키키를
향한 호기심으로 글에 접근하게 된다. 이를 통해 키키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짐작하게 되고 이후에는 왠지 이야기를 들어주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으로 글을 읽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감상자 대부분은 키키에게 자신
을 또 한 차례 대입한다. 서정배가 전시장에 방과 집을 지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작가는 관객이 각자의 기억으로 키키의 서사를 온전히 더듬기를, 물리적인 공간 안에서 키키와의 정서적인 교감을 이루길
바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탈각과 탈피 장면의 반복이 키키의 불안에 더욱 가까워지게 한다. 키키는 자주 나체로 등장한다. 하지만 옷을 입지 않은 키키를 보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 그 이유는 그러한 장치의 목적이 타인의 시각적 쾌락
이나 방어또는 위협을 드러내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키키가 옷과 신발을 벗는 행위는 속살을 드러내고서라도 타자에게 솔직한 태도로 다가가겠다는 순수하고 동물적인 제스쳐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키키의 간절함이
무색하게도 서정배의 작품에서 타인은 키키와 한 방향으로만 소통한다. 심지어 키키는 군중과 사회에서 벗어나 대체로 혼자 있다. 타인은 그림자로 등장하거나, 키키가 외면하고 밀쳐내고 매달리는 존재로 드러난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그녀가 기형도 시인의 '붉은 달'의 한 구절을 중얼거린다. 기형도 시인이 다른 의미에서 이 구절을 썼을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 키키는 ‘위대한 혼자’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느낀다. 지금 이 순간의 ‘혼자’라는 사실이 진심으로
너무 ‘위대하여’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젖은 몸을 깨끗한 수건으로 닦은 후, 불을 끄 고, TV를 켜놓은 채, 그녀는 다시 침대 속에 들어갔다. 어찌된 일인지 아침을 기다리고 싶진 않다고 생각하면서... (검은담즙 #48)

그간 나는 서정배가 회화 작가라고 멋대로 오해했다. 뒤돌아보니 서정배는 늘 전시장에 글을 붙이거나 매달고, 벽을 세우고, 거울이나 네온 등의 오브제를 놓아두곤 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평면 작업을 위한 부차적인 요소라
고 섣불리 판단했다. 키키가 자서전을 내놓는 이 시점에서 이 모든 장치를 종합한 결과, 서정배의 글 작업은 드로잉과 페인팅 감상의 이해를 돕는 서브 장치라기보다는 키키의 세계관에서 사유적 부분을 담당하는주체이고
입체물은 키키의 실천적 지향점을 드러내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오히려 드로잉과 회화는 이 장치들이 표상하는 세계관을 압축시켜 보여주는 결과물에 가깝다. 그림 속 요소들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추상적인 것의 연속이어서,
규칙이 없는 무작위의 산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키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머리카락, 몸에서 자라나는 나뭇가지 그리고 눈물, 연기 등은 산호초와 같은 자연물의 유기적인 질서를 내포하며 균형미를 이룬다.
특히 무질서하게 풀어지지 않은 채 구상적인 형태로 뻗어 나가거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등의 선형적인 장면은 철저히 물리법칙을 따르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다만 촘촘하게 기록한 키키의 일기라는 방대한 내러티브
가 압축적으로 평면에 드러나다 보니 그림 안에 다양한 시간이 복잡한 레이어로 박제되어 있는 듯 보일 뿐이다. 그림 속 키키가 사연 많아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에 작품 속 키키는 '많은 것을 거세한 키키'임에도 눈길이 더 가고 귀를 기울이게 한다. 성별, 옷, 표정을 뒤로 하고, 특히 군중을 제쳐 두고 본질 곧 자기 자신으로만 덤덤하게 남은 키키를 보며 초반에 언급한 ‘불안’을 다시
떠올린다. 멀리서 보니 불안은 키키에게 유일하게 남은 온전한 것이며, 키키는 그것을 끊임없이 의식해오고 있었다. 서정배 작가는 전시에 종종 ‘창’과 ‘거울’을 놓아 두어 보는 이에게 키키의 이러한 의식을 상기해주었다.
'불안은 나의 온전한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서정배가 정지시킨 키키의 시간과 시간의 틈에 서서 무의식 중에 이런 생각을 하며 안심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나는 그림자처럼 나의 온 생에 따라붙을
이 불안을 의식적으로 마주하는 정지된 시간마다 이 안도감을 떠올릴 것이다.


1 서정배, 「4월, 다시 4월」『,스튜디오 화이트블럭 제4기 입주작가전』, 도록(파주:아트센터 화이트블럭, 2018), 36-37
2 임은신, 「블루이쉬 랩소디 Bluish Rhapsody」, 2022년 6월,https://www.seojeongbae.com/bluish-rhapsody
3 서정배, 작가노트, 2019

4 박성봉, 『감성시대의 미학』 (서울: 일빛, 2011),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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