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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 또는 당신의 하루 - 서정배의 그림과 글

                                                                                          경_철학박사
                                                             

   서정배의 그림은 당신에게 말을 건다. 키키는 당신 또는 당신의 어떤 모습이다. 키키는 작가 서정배의 분신이자, 당신이 가진 어떤 모습의 분신이다. 분신(分身), 나뉜 몸. 불교에서 말하듯, 분신이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부처가 스스로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정배의 키키는 한 몸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몸들이다(참고로, 작가는 키키라는 이름을 키키 스미스, 마녀 배달부 키키, 키키 드 몽파르나스 등에서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를 현대어로 탈신화화시키면, 모든 분신은 동일성ㆍ정체성(同一性ㆍ正體性, identity)의 압도적 지배에 숨 막힌 우리의 숨통을 터주기 위해 우리로부터 갈라져 나온 새로운 게임, 다른 놀이로서 기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때, 이 ‘새롭고도 다른’ 놀이는 다름 아닌 이질성ㆍ타자성(異質性ㆍ他者性, difference)의 놀이일 것이다. 모든 분신 또는 대타자처럼, 이 분신은 때로 당신의 통제를 벗어나, 살아 움직인다. 타자성이란 정의상 내가 아는 것의 바깥,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 내가 내 손에 움켜쥔 것만이 나를 살릴 것 같지만, 오히려 우리는 때로 그러한 것들로 인해 질식해 서서히 죽어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내려놓을 때, 곧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들로 인해, 산다. 분신은 죽어가는 당신을, 살린다. 이것이 서정배의 키키가 우리에게 기능하는 방식,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 우리를 살리는 방식이다.

 

   나는 서정배에게 물었다. 하고 많은 방식 중, 왜 바로 이 방식으로 작업하는가? 서정배는 이렇게 말했다. ‘일상이 작업에 스며드는’ 방식을 찾고 싶었다. ‘그림을 통해 어떻게 내가 느끼는 일상의 서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쓱 그냥 한 번 보고 지나가는 그림이 아닌 그 안에 많은 이야기를 숨겨놓고 보고 또 보는 작업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키키라는 작가의 분신, 곧 키키라는 장치를 도입한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에 따르면, 어느날 글을 쓰다가 ‘표현했어야 했는데, 말로 못 한’ 나의 이야기를 3인칭으로 바꾸어 놓으니, ‘후회스러운 일도, 부끄러운 일도 내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키키는 이처럼 자기와의 거리두기를 위한 장치이다. 말하자면, 키키는 우리 모두가 가진 어떤 측면, 곧 I의 분신이다(물론, 우리 모두는 I이자 E이다. I와 E은 둘이 아니듯, 때로 I와 E는 뒤섞인다. 이는 모두 우리 자체의 성향이 아닌, 우리의 성향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인식의 범주, 패턴이다). 서정배는 이 키키의 기능과 관련된 나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키키’라는 이름은 작업 안에서, 작가인 나와 분리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나의 의도가 이럴지라도 사람들은 내 이야기라고 믿거나 의심하기도 하지만) 내게 있어 ‘자유’로운 상상을 주는 기능을 한다. [작가의 글 모음집인] <검은 담즙>에 쓰인 에피소드들에는 ‘키키’라는 이름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기도 하고, ‘진실’을 가리기도 하고, 또 ‘거짓’ 속에 진실을 드러내는 등 내게는 ‘자유’의 장치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나’에게만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이 이름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서정배의 진실은 오직 서정배의 진실일 뿐이다.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종종 잊는다. 그리고 나의 진실을 우리의 진실로 착각하며, 나의 진실이 우리의 진실이거나 진실일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진실은 그 ‘보편성’으로 인하여 우리의 진실이 된다. 그런데, 키키는 자기 진실의 보편성을 스스로 부정한다. 키키는 나의 진실은 다만 나의 진실일 뿐이라고 말한다.  

 

   “‘키키’의 이름으로 쓴 이 글들을 통해 내면의 감정과 관념을 기록하고 시각 예술의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의 의미를 내게 다시 묻는다면, 누구나 품고 있는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알아가고 싶은 ‘열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 ‘나’와 ‘그녀’의 주어로 구분할 수 있는 이 이름 사이에는 매 순간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나’를 자각하는 행위가 있는 것이다.”(서정배, <나에게 말하는 진실과 거짓>, 계간 《자음과모음》, 2021년 08월호)

 

   키키는 오직 나의 진실만을 말한다. 키키는 결코 나의 진실이 우리의 진실인 양하지 않는다. 보편성(universality)이 개별과 특수라는 보조적 상대항을 통해 결국 세계의 모든 것을 자신의 이미지 속으로 통합시켜버릴 때, 오직 ‘매번 다른’ 각자의 지금만을 가지고 있는 1회성(singularity)은 세계를 그냥 지금 모습대로 존중한다. 만약 내가 내게 이해되는 것만을 존중한다면 나는 나의 세계에 속한 것들, 곧 나의 세계만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내게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 존중하기로 결정한다면, 아마도 나는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둘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키키는 꼰대가 아닌 자, 결코 이런저런 방식으로 강요하지 않는 자, 곧 어떤 특정 목적이나 의도 없이 그저 그냥 나에 대해 말함으로써 스스로를 말하고, 그럼으로써 네가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내버려 두는 어떤 자이다. 서정배에 따르면, 키키는 오직 나에 관련된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내가 작업 속에서 이미지로 표현하는, 내가 느끼는 기쁨, 슬픔, 고통, 외로움, 혹은 불안은 이미지 없는 단어들에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키키가 갖는 주된 정서 중 하나는 분명 우울(melancholia)이다. 매우 정신분석적인 이 우울, 때로는 자기 파괴적일 정도로까지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우울은 작가가 전시와 함께 출간한 자신의 글 모음집의 제명을 <검은 담즙>(La bile noire)이라 붙였을 만큼, 작가에게 중요한 정서이다. 검은 담즙이란 엠페도클레스에 기원을 두며 고대 그리스-로마의 히포크라테스-갈레노스학파에 의해 정리되어 중세와 르네상스까지 서양 의학 담론을 이끌었던 4체액설(體液說) 중 우울의 원인이 되는 흑담즙(黑膽汁)을 말한다. 흑담즙에서 기인한 우울은 ‘오래 지속된 두려움과 슬픔으로 사람이 무기력해지는 증상’으로, ‘예술과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노출’된다. 그리고 키키의 가장 기본적인 정서, 근본 기분(Grundstimmung)은 우울이다. 키키는 결코 자신의 우울을 숨기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키키의 세계는 우울의 찬가(Elogia Melancholia)이다. 그리고 우울이란 오직 단독자의 현상, 실존의 고독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죽는다 해도, 우리 각각의 죽음은 오직 각자의 것이듯, 설령 우리 모두가 동시에 우울하다 해도 우리 모두는 오직 각자 홀로 우울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키키라는 분신을 이용해 자신의 우울과 고독을 드러냄으로써, 서정배는 그림을 보고 글을 읽는 나에게 특정 효과를 발생시킨다. 키키의 고독과 우울은 나에게 나의 고독과 우울이 ‘그럴 수 있는 것’,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해준다. 고독하고 우울한 키키는 나의 고독과 우울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심미적-윤리적 장치이다. 

 

   “내게 우울인 멜랑콜리는 인간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즉 희노애락처럼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 중 하나인 것이다. 내가 느끼는 이 우울, 멜랑콜리라는 감정은 내게만 존재하는 독특한 것도 아닌 보편화된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시각 예술가로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감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키의 우울은 나에게 위로를 주는 우울이다. 키키는 내게, 그래도 괜찮다는, 그래도 된다는, 그럴 수도 있다는, 그런 일도 있다는 말을 건넨다. 키키는 나에게 위로를 준다. 이 세상의 모든 감정처럼, 우울도 자신만의 가치를 갖는다. 키키는 우리에게 세상에는 우울한 일이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우리는 우울한 날이 있고, 우울할 수 있으며, 우울해도 된다고 말한다. 당신의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도 표출하지도 말 것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나의 진실한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내가 진실하게 우울할 때, 내가 나의 우울을 말하고 그려내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우울은 우울 나름의 가치가 있다. 당신의 우울은, 옳다. 당신의 사랑과 똑같이, 당신의 불안과 우울은, 옳다, 가치가 있다. 이것이 키키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우울한 키키를 보며, 우리는 더 우울해지고 침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 놀랍게도, 그리고 이상하게도 - 어떤 위로와 안도감을 얻는다. 우울한 키키가 우리와 세계에 우울이 아닌, 위로를, 차이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왜 우울에 대한 서정배의 단순하고도 정확한 묘사가 우리에게 위로와 차이를 가져오는가? 이는, 모든 이미지와 텍스트가 말해주듯, 어떤 사태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 그러한 사태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인식과 묘사 자체가 세계를 변화시킨다. 변화란 차이의 발생이다. 키키라는 ‘그녀’는 ‘나’라는 고정된 텍스트에 ‘차이’를 발생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하나의 장치이다. 

 

   모든 이미지는 자신이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난다. 우리에 대한 묘사는 우리를 우리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것이 이미지의 역능이자, 기능이며, 운명이다. 키키라는 이미지, 우리 앞에 작가 서정배의 작품 속 이미지라는 형식으로 캔버스 위에 나타난 이 이미지는, 우리를 우리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키키는 거리두기, ‘벗어남’을 위하여 고안된 장치이다. 장치는 ‘그것이 없을 때는 발생하지 않을 특정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한’ 것이다. 키키는, 서정배와 키키, 곧 ‘나’와 ‘그녀’를 분리시키는 장치, 자기를 낯설게 보게 만드는(疏外, Entfremdung) 장치,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이’를 자각하게 해주는 장치이다. 서정배의 키키는 작가와 관객 모두를 스스로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한편 와인을 즐기고 책과 영화를 사랑하며 낮에는 종종 친구도 만나지만 결국은 고독과 밤을 좋아하는 우울한 키키는 여성이다. 키키는 오직 키키일 뿐이기 때문에, 키키는 여성이되 여성에 관한 규격화된 이미지에 들어맞기도 하고 잘 들어맞지 않기도 한다(이런 면에서는, 여성이라는 지칭을 LGBT+나 생명, 또는 또 다른 무엇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여성처럼, 키키는 다만 키키일 뿐이며, 무엇보다도 인간이다. 여성으로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과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 중 어느 하나에 일반적 우선권을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세상의 어떤 누구도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본질주의적으로 독점할 권리는 없다. 키키라는, 오늘 우리 시대의 어떤 여성(또는, 차라리 인간), 혹은 여성(또는, 차라리 인간)이 느끼는 어떤 감정과 상태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로 옳은 것이다. 여성은, 인간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또는 이래서는 저래서는 안 된다는 말은, 단지 그 말을 발화한 자가 조건화된 인식의 체계를 보여줄 뿐이다. 

 

   키키는 여성에 대한, 인간에 대한, 우울에 대한 모든 기존의 본질주의적 규정을 벗어나며, 오늘 지금 시시각각 매순간 변화하는 ‘나’의 이런저런 모습을 비-본질주의적으로 보여줄 뿐이다(이 이런저런 모습들을 넘어선 ‘나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서정배의 작업이 동시대에 갖는 여러 심미적 기능과 윤리-정치적 효과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개인은 고립된 원자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사회이며, 역사이다. 우울은 의학적이고 심리적인 동시에 정치-사회적인 서사이다. 여성은 남성의 결여 혹은 대립항으로서만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며, 오직 복수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나는 인간과 여성, 우울에 대한 기존의 실체론적 서사를 거부하고, 오직 지금-여기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들’(나는 이것이 여러 키키‘들’이 하나의 캔버스에 거의 대부분 늘 ‘복수’로 등장하는 이유라고 믿는다)만이 존재하는 서정배의 키키 작업이 우리 시대 ‘여성주의적’ 인식의 확장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키키라는 그녀는, 키키라는 너이자, 키키라는 나이다.

 

   키키의 우울이 우리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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