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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배의 <하루 소설 Novel d’un jour >
임은신_큐레이터/도로시대표

<하루 소설 Novel d'un jour>이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루 소설>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어떤이는 오! 하며 감탄을 하고, 또 어떤 이는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아마도 하루의 소설, 그러니까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어떤 이야기를 쓴 소설이라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작가는 이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소설로, 그림으로 어떻게 쓰고 싶었던 것일까.

서정배 SEO Jeong-Bae는 오랫동안 키키 kiki 라는 가상의 인물의 목소리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해 왔다. '오랫동안' 이라 함은 그가 오랜 프랑스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 1년 전인 2008년부터  지금까지이니 15년 가까운 세월을 이야기한다.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후 미술 공부를 계속 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건너간 동아시아의 젊은 여성으로서 프랑스에서 겪고 느낀 것들, 또한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젊은 여성으로서 살아가면서 겪고 느꼈던 것들, 외로움과 고독, 우울, 멜랑콜리는 서정배가 작업하는 근간이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이렇게 그가 겪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글로 쓰면서 시작된다.

미술(美術 fine art)–시각예술(視覺藝術 visual art)에서, 서정배가 선호하는 용어로 보자면 조형예술(造形藝術 plastic art)*에서 창작의 시작이 글 text에서 시작되는 경우는 드문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릴 적 미술 시간에 배웠듯, 스케치–밑그림에서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밑그림의 형태는 드로잉이나 사진과 같은 평면이 되기도 하고 작업 방식에 따라서는 입체가 될 수도 있고 또 영상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대부분의 밑그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서정배는 그 시작을 '글'을 써서 한다. 자신이 겪은 일을, 자신이 느낀 것을, 자신이 생각한 것을 글로 먼저 적어내고, 이를 눈에 보이게 시각적으로, 조형적으로 형상화 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글을 먼저 쓰고 이후에 이를 이미지로, 조형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서정배의 작업에서 내러티브 narrative, 즉 서사(敍事)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러티브 narrative란 우리말로 적당한 용어를 아직 찾아내지 못한,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말이다. 서사체(敍事體)라고 하기도 하지만, 왠지 영어의 내러티브가 주는 만큼의 느낌은 오지 않는다. 내러티브는 어떤 사건에 대하여 시간의 순서, 인과관계의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서술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흐름에 따라 이야기하는 것이 내러티브고 서사이다. 그리고 서정배의 작업에는 내러티브 – 흘러가는 이야기와 시간이 있다. 서정배는 그렇게 어떤 내러티브를 먼저 글로 표현하고 뒤이어 드로잉으로, 회화로, 설치로, 움직이는 영상이미지로 형상화하며 작업한다. 그리고 그의 내러티브는 언제나 그 자신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경험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꽤 오랫동안 보아온 키키의 이야기는 그렇게 작가의 프랑스 생활 – 좀더 구체적으로는 유학생으로서, 뒤이어 외국인 작가로서 살아가던 파리의 일상과, 귀국 후 모국에서 작가로서 살아가는 일상을 담고 있었다. 한 가지 특별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듯, 서정배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키키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 삼아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옮기듯 3인칭 시점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키키라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쓴 허구의 소설 같은 서정배의 글 <검은 담즙 La bile noire>과 그 글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수 십, 수 백여 점의 회화와 드로잉과 설치는 사실은 허구가 아니라 작가가 현실에서 실제로 겪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기록한 일기였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글이든 그림이든 밖으로 풀어내어야 했던, 표현이 절실했던, 어떤 방식으로든 작업이 절실했던 작가는 그러나 동시에 자신을 너무나도 투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대변하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내어 그의 뒤에 '숨어' 그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나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이들은 키키의 이야기로 읽고 볼 것이기 때문에 부끄러울 일이 없었다. 이건 키키의 이야기이고, 키키의 일기장이며, 키키의 고백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키키를 통해 보여 준 서정배의 일상과 생각, 감정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꽤 많은 사람들이 키키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내며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며, 또 같이 우울해 하고, 같이 위로했다. 프랑스에서 살아 본 적이 있든 없든, 젊든 나이가 많든, 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성들이 키키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위로받았다. 일상 속의 크고 작은 감정들은 꽤나 일반적이었고, 이를 가감없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쓴 서정배의 키키의 일기와 그 일기를 바탕으로 조금은 과장되게 또 때로는 간결하게 형상화 한 서정배의 드로잉과 회화, 설치는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러한 타인의 공감은 작가를 위로했고, 안도하게 했다. 오랫동안 키키의 뒤에서, 키키를 통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에 만족했던 서정배는 이제 무대 앞으로 나오기로 했다. 더이상 키키, '그녀 elle'의 이야기가 아닌, 서정배 자신, '나 je-moi'의 이야기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서정배의 작업이 근간이 되는 그의 글은, 3인칭 시점인 '키키는, 그녀는'으로 쓰여지던 것에서 이제 일인칭의 '나는'으로 바뀌게 된다.

서정배가 키키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완벽하게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은 지난 해 3월에 진행되었던 개인전 <나날이, 밤마다 Day by day, every night (2022, 스페이스로)>의 역할이 컸다. 너무나도 솔직하게 투명하게 그려낸 자신의 일기장과 같았던 드로잉들을 한데 모아 보여뒀던 이 전시를 통해, 작가는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할 결심이 섰다. 작가는 "내장을 꺼내어 내보인 것 같이" 부끄러웠다고 하지만, 육성으로 들려주는 서정배의 이야기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키키의 목소리를 통할 때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그리고 올해 초, 서정배는 그간의  작업을 한 데 모아 묶은 작품집 <KIKI - 키키의 자서전 (2023, 인디펍)>을 출간하면서 키키와 함께 한 첫번째 장 chapter을 근사하게 마무리했다. 조형작업과, 지난 10여년 간의 작업의 근간이 되며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던 그의 글 <검은 담즙>의 꽤 많은 부분과, 미술전문기자, 연구자, 큐레이터가 각자의 입장에서 써낸 세 편의 글 - <성실한 고독(김해리, 아트인컬쳐 기자)>, <나와 키키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한의정, 충북대학교 조형예술학과 조교수)>, <불안해서, '위대한 혼자'(김유빈, 고양시청 문화예술과 큐레이터)>을 함께 엮은 이 작품집은 서정배의 작업에 한 층 더 의미를 부여해주고 또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렇게 ‘키키 kiki’의 시대를 마무리하며 서정배는 이제 새롭게, <하루 소설 Novel d’un jour>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다.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검은 담즙>의 새로운 장(chapter)"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루 소설 Novel d'un jour>은 <키키의 자서전 Kiki's Biography (혹은 키키의 일기 Kiki's Diary)>과는 두 가지 면에서 다르고 또 같다. 우선,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 픽션 fiction - 허구(虛構)이고, 자서전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 논픽션 non-fiction - 사실(事實)이다. 논픽션은, 특히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는 자서전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일인칭 시점인 '나'를 주어로 쓴다. 자서전이나 일기를 3인칭 시점인 그나 그녀로 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3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일기는 자연스럽게 3인칭 전지적 시점이 될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그 혹은 그녀라는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 타인은 결국 나이기 때문에, 그/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물론, 감정까지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정배의 키키 이야기가 그런 경우다. 서정배가 3인칭 시점으로 일기를 썼던 것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되 거기에 지나치게 파묻히지 않고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이야기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일게다. 그리고 그 덕분에 키키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이야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제, 실제 있었던 일, 실제의 감정에서 더욱 벗어나 이번에는 ‘소설 novel’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사유를 표현하려고 하는 서정배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인칭의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맞았다. 작가는 키키의 목소리를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보다 더 감정적이었고, 자유로왔고, 솔직했었는데, 이제 진짜 '나'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오히려 보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는데에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고스란히 작업으로 드러난다. 기존에 그의 작업에 등장했던 사람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강하게든 약하게든 서정배의 모습이 비춰졌던 반면, 이번 <하루 소설>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작가 본인보다는 그가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이 더 많이 등장한다. 작가 자신이 등장할 때에도 대부분 자신은 조연이고, 주연은 그와 함께 했던 지인들이다. 화자는 일인칭 '나'이지만, 화자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담아내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을 쓰고 있다. 서정배의 작업과 일상을 잘 이해하는 동료 작가 L의 이야기처럼, 서정배는 "키키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면, 이제 하루 소설을 통해 자신의 시선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예전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애써 자신의 감정이 아닌 것처럼 작업을 했었다면, 이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이든 타인의 이야기이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다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객관적이면서 또 주관적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루’일까. 서정배는 오래 전부터 하루의 일상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를 해왔다. 그의 작품에는 종종 어느 일정한 시간들이 등장한다. 오후 3시 , 3pm, 월요일 오후 3시 Monday 3 pm, 0시 0am, 자정 midnight, 어제와 오늘 사이 등 하루하루의 일상이 소중하고 그 안에서 많은 감정을 겪고 사유하는 작가는 삶의 단위 중 가장 기본이 되는 '하루'에 집중한다. 내러티브가 중요한 그의 작업에서 시간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중요한 요소일 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매일의 일상에서 특별한 순간을 찾아내고, 또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무료한 매일의 일상을 그만의 문체와 필력으로 서술하며 특별하게 만들었다. 서정배에게 하루의 일기를 쓰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은 아주 어릴 적부터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생각이 많았고 감수성이 남달랐던 소녀는 고독하고 외로왔고, 그 외로움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으로 해소되곤 했다고 했다. 한 때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기도 했던 그는 글보다는 조형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풀어내는 조형예술가가 되었고, 그의 남다른 감수성은 그렇게 키키의 목소리를 빌려 쓴 일기로, 그리고 이제 그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하는 <하루 소설>로 쓰이고 그려져 마치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같고, 나의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 같은 묘한 공감대를 형성해주는 특별한 작업이 되었다. 일인칭과 삼인칭,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묘하게 넘나들며 별 것 아닌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고, 특별하고 개별적인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서정배의 작업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나의 하루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그 안의 특별함과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작가가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아닌 <하루 소설>에 나도 등장해서 그의 시선으로 보여진 특별한 주인공이 되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하루도, 나의 하루도 그의 <하루 소설>을 통해 특별해 지고, 외로움과 고독, 멜랑콜리 melancholy 안에서 힘겨웠던 우리는 어느 덧 위로 받고 편안해진다.

이번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하루 소설 Novel d'un jour> 연작은 사실 아직 키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던 2020년 경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마무리한 작품들이다. 화자가 타인인 키키kiki이든, 작가 자신인 '나'이든, 서정배 작업의 소재는 실제 있었던 일상의 어느 순간에서 찾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떤 순간을, 어떤 사건을 그려내는 감정의 온도는 분명하게 변했다. 외로움과 고독에 파묻혀 하염없이 멜랑콜리 속으로 빠져들어 더 이상 우울할 수 없는 극도의 순간까지 다다름으로써 위로를 찾았던 예전의 작업과는 달리, <하루 소설>에서는 문득문득, 순간순간의 위로가 외로움과 고독과 공존한다. 키키라고 할 수 있는 나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함께이고, 혼자여도 신기하게 고독하지 않다. 우울한 것 같으면서도 따뜻하고, 외로운 것 같으면서도 행복하다. 얼굴을 가리고, 등을 돌리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나를 바라봐주는 따뜻한 시선이 어딘가에 있음이 느껴진다. 장면마다 거의 한 사람씩만 등장했던 기존의 작업과는 달리 <하루 소설>에서는 여러 화면에 나뉘어 그려져 있을지라도 이 부분들을 모아서 하나로 만들면 등장인물들이 함께 어우러진다. 극도의 우울과 외로움을 대변하던 <블루이쉬 랩소디 Bluish Rhapsody (2018, 도로시 살롱)>의 푸르스름한 빛깔들은 조금씩 조금씩 밝아지고, 따뜻해졌다. 얼굴이 없는 목 아래부분만 그려진 등장인물들도 그 몸짓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을 것만 같은 따뜻함과 다정함이 느껴진다. 이번에 선보이는 <하루 소설> 연작 중 꽤 많은 수가 "만남 Rencontre"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것만 봐도 더 이상 그가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위대한 혼자"였던 키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온 것일까. 혹은 나도 혼자이고 너도 혼자이니 이제 우리 같이 함께 외로워해보자, 함께 외로우면 조금 덜 외롭지 않겠나 하는 변증법적 위로일까. 분명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외로와도 우울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긴. 이전의 블루이쉬 랩소디에서도 외로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를 위안이, 어딘가 모를 함께하는 따뜻함이 느껴지기는 했었다. 그리고 그 어딘가 모를 함께 하는 따뜻함은 한층 더 깊어지고, 분명해졌다. 여린 소녀였던 키키는 이제 단단하게 성숙한 여인으로 자라나 자신의 감정을 보듬고 위로함은 물론 이제 타인의 외로움과 감정을 보듬어 주고 위로하고 있다. 서정배 SEO Jeong-Bae가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우리의 일상 이야기 <하루 소설 Novel d'un jour>을 통해 나도, 당신도 나의 특별하고 따뜻한 <하루 un jour>를 그려보면 어떨까.

 

덧1. 서정배는 장-뤽 고다르 Jean-Luc Godard 의 영화를 좋아하고, 최근 노벨 문학상(2022)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의 글을 좋아한다. 자전적 이야기를 주로 글로 쓰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가는 아니 에르노의 창작 방식은 서정배가 <하루 소설 Novel d'un jour>을 통해 닿고자 하는 곳과 가깝다.

덧2.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서정배가 새롭게 시작하는 연작의 제목인 <하루 소설 Novel d'un jour>은 서정배 작가에게 중요한 '하루'와 '소설'을 결합한 것이다. 원래 처음에는 '하루의 소설', '오늘의 소설'을 염두에 두었다가 최종적으로 <하루 소설>로 귀결되었는데, 간결하고 다양한 해석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이 작가가 의도하는 바와 잘 맞았다. 아울러 외국어 제목도 작가가 불어권에서 공부한 점을 반영하여 영어가 아닌 불어로 번역하되, '소설'은 영어 단어를 사용하여 불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하는 사람에게는 문법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는 제목이면서 불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novel 이라는 단어 만으로도 어떤 소설을 의미함을 짐작할 수 있음에 착안하여 두 언어를 혼합하였다. 더욱이, 영어의 소설 novel과 불어의 단편소설 nouvelle은 발음이 거의 비슷하여, 일종의 언어유희를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서정배는 자신이 하는 일을 미술(美術 fine art)이나 시각예술(視覺藝術 visual art) 보다는 조형예술로 부르고 자신을 작가 artist, 혹은 조형예술가 artiste plasticienne 라고 칭한다. 조형예술가는 프랑스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이고, 영미권에서는 조형예술가보다는 시각예술가로 주로 쓰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미술가, 혹은 아티스트를 번역하여 예술가로 쓰이는 경향이 더 많다. 최근에는 작업의 쟝르 구분이 모호해 지고, 다양한 매체를 혼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화가, 조각가, 사진가 같이 한 분야를 특정하여 작가를 칭하는 일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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