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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키키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한의정_충북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
르네상스 시기 자주 인용되었던 “Ogni pittore dipinge sè (모든 화가는 자기 자신을 그린다)”란 말은 예술가들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작품 속에 자기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문장을 화가들의 자기참조, 자동모방(automimesis)으로 이해했으며, 다양성을 위해, 무의식적인 자동모방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자기참조, 자동모방은 예술가 자신만의 스타일 확립을 위해, 작가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반복’의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술의 기능을 세상으로 열리는 ‘창문’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거울’로 나누어 설명하는 오래된 미술 해석의 방법을 고려할 때, 서정배의 작업은 거울형 작업에 가깝다. 작가 자신의 것들이 작품에 투사되는 자기참조적(self-referential), 자기반영형(self-reflective) 작업이라 할 수 있다.
Identity: 나 자신을 드러내기
과거 프랑스 유학시절 서정배의 작업은 하이힐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았다. 동양에서 온 여성 작가의 하이힐 작업은 쉽게 섹슈얼리티의 소재로, 금기시되는 경험을 꿈꾸는 여성의 욕망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해석에 작가는 보다 멀리 떨어져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 방법으로, 작가의 분신(double)이자 페르소나(persona)로 키키(kiki)라는 인물을 창조해낸 것이다. 즉 키키는 작가의 자아 대신 세상에 내놓은 얼굴, 공적 가면(public mask)이다.
키키(kiki)는 매일 일기를 쓴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키키의 일상과 감정, 사유의 흐름이 기록되는 다이어리에는 키키가 만난 사람, 그녀가 기억하고 싶은 시간과 장소, 듣는 음악, 읽는 책, 보는 영화가 나열되고, 그때그때마다 떠오르는 키키의 상념과 느낌이 부유하듯 떠다닌다. 키키의 세계는 분명 작가 서정배가 창작해낸 가상의 세계인데, 관객(혹은 독자)는 이 세계 안에서 자꾸만 서정배의 삶을 구별해내려는 욕망을 느낀다.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의 격언처럼 그림(글)에 화가(글쓴이)의 ‘무엇인가’가 표현되기 마련이라면, 키키의 일상과 감정의 기록에 존재할 서정배의 것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작가 서정배가 의도한 바일 텐데, 아이러니하다. 작가와 작품이 동일시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조해 낸 캐릭터에서 다시 작가의 삶을 찾아내고자 하니 말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truth란 단어를 바로 또는 거꾸로 쓰면서 진실/탈진실, 현실/가상, 픽션/논픽션 사이를 유영해나간다. 관객(독자)은 그 세계를 함께 떠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구별하기’를 멈추게 된다. 사실 그 일상의 삶이 온전히 가상의 인물인 키키의 것이든, 작가 서정배의 것이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의 삶에서 타인에게 보여주는 사회적 자아로서 페르소나가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가면이듯, 그 본질이 ‘가상’(virtual)인 예술의 세계에 살고 있는 키키가 반드시 작가의 삶과 사유를 대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키키는 서정배의 분신이지만, 작가가 선택하지 않은/않을 행동을 하고, 작가가 느끼지 않은/않을 감정을 느낄 ‘낯익은 낯선’(uncanny) 자아이다. 아니 어쩌면 프로이트의 말대로 이 ‘낯익은 낯섦’은 어둠 속에 묻혀 있어야 했을 나의 분신이 제 나름의 삶을 살고 있음을 목도했을 때의 두려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Alterity: 내 안에 타자를 담기
그래서인지 키키의 다이어리에는 양가감정이 계속 드러난다. “채워지지 않아도 좋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고 되뇌이지만, 결핍을 채우려 욕망의 대상을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대체해나간다. “기대하지 않아도 좋다. 기대할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라 애써 위로하고 “온전하고 완전한 나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되뇌이지만, 반복적으로 타자를 향한 욕망을 드러낸다. 새로운 만남을 꿈꾸지만, 깊게 사귀는 것은 두려워하고, 떠나가는 것에 안심한다. 그런 탓인지 키키는 사랑과 증오를 혼동하고, 나쁜 기억도 좋은 기억으로 전환시키며, 타인의 부재를 현존으로 여기는 방법을 알고 있다. 떠나간 사람을 내 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여기부터 내 안에 있는 타자, 또는 라깡이 ‘대타자(Autre)’라 말한 무의식의 존재는 타인들(autres)과 구별되지 않고 내 곁을 맴돈다.
드로잉이나 회화로 시각화된 다양한 모습의 키키들은 그런 이유로 유령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타인에게서 비롯된 외로움, 인간 실존의 고독과 우울, 다가올 위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힌 키키들은 얼굴에서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차도르와 같은 옷으로 최대한 몸과 머리를 가리고 있다. 서정배 작품이 보여주는 전반적인 정서가 멜랑콜리와 불안이라면, 그리고 멜랑콜리로 가는 지름길이 게으름과 나태이고, 불안의 극단적 상태가 무기력으로 나타남을 고려한다면, 키키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너무나 당연하다. <너를 위한 위로>든 <나를 위한 위로>든 위로하기 위한 춤을 출 때조차도 표정은 동일하다. 그래서 오히려 이 춤은 위로의 춤이라기보다는 도플갱어를 부르는 ‘마녀의 춤’(Hexentanz)이 된다. 이처럼 서정배 작품 속에 등장하는 키키들은 서정배의 감정과 상념의 의인화(anthropomorphism)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또 다른 그들의 잃어버린 짝(pair)을 소환하며, 그들 근처에는 그들의 이중적 자아, 분신, 도플갱어들이 편재하고 있다. 자크 데리다가 말한 것처럼 존재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유령들일지도 모른다.
나와 타자, 존재와 유령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근거가 되어주지만 서로 다른 의식과 언어체계를 가질 것이므로 소통이 쉽지 않다. 서정배는 그의 작업에서 ‘내러티브’의 시각화를 시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서사가 독자에게 술술 읽히는 이야기 구조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캐릭터 간의 이러한 불연속성 탓이다. 서정배의 서사는 <작은 생각들>(2019)에서처럼, 한 여성의 호흡이 다른 여성을 낳고, 물속으로 눈뜬 채 침잠하는 여성의 자궁에는 또 다른 존재가 잠자고 있는 식으로, 오토마티즘(automatism) 기법처럼 전개된다. 같은 무의식의 바다를 공유하는 또 다른 방에서는 허우적대며 걸어가는 사람, 멍하니 앞만 보고 서 있는 남자, 적극적으로 들어오는 사람 등이 제시될 뿐이다. 관객은 이 모호함 속에서 소설식 이야기 구성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 이미 키키의 다이어리 『검은 담즙』에서 보았듯이, 또 우리의 꿈과 기억이 그러하듯, 그녀의 이야기는 불연속적이며 파편적이며 동시적이다. 그래서 서정배의 서사는 시처럼 읽어야 한다. 시에서는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함축하며, 운율과 리듬으로 읽어야 하며, 전체적으로 전달하는 정서와 분위기가 있다. 서정배의 롤 형식으로 보여주는 이미지 작업들, 그리고 이미지의 연쇄라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에서 이러한 시적 은유는 더욱 명확해진다. <Insomnia-Dream>(2022)은 드로잉 선이 이끄는 대로 이미지를 탄생시키고 변형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파란 햇살이 여인의 호흡이 되고, 드로잉 선들이 여인을 창문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기도 하지만, 다시 나타난 창문 사이 햇살은 손 위에서 작은 나무를 탄생시킨다. 작가가 작품에 자주 등장시키는 창문, 문, 거울, 캔버스와 같은 프레임들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하나의 의식에서 다른 의식으로의 이동 가능성, 또는 두 차원의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차원들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감내하는 키키들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보편적 자아상이자 “회화는 시처럼”(ut poesis pictura)을 실천하고 있는 시어들이다.
나와 타자들의 세계를 그리기
사실 시보다 훨씬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시각예술이다. 구상 표현을 떠나 한없이 압축화(abstraction)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정배의 경우, 주로 설치 작업들에서 이러한 추상요소들이 자주 목격된다. 키키의 다이어리에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감정들이 동그라미, 세모, 네모와 같은 기하학적 도형들로 표현되었던 것에서 착안하여, 감정과 관념들이 여러 추상적인 형태로 제시된다. 예를 들어, 불안이라는 감정은 사각뿔 세 개의 불안정한 결합으로 시각화되거나, 주체와 타자의 욕망 관계의 도식화로 나타난다. 우리의 생각들이 이쪽저쪽으로 뻗어가듯 <관념의 나무>(2014)는 가지와 뿌리 양쪽으로 뻗어나간다. 네온 빛은 ‘사유의 장치’를 은유하며, 거울도 의식과 무의식의 주체를 담는 매체가 된다. 《불안에 대한 원근법》전(2022)에 선보인 겹쳐지고 쪼개진 원 모양의 거울들 앞에서 관객은 분열된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도 있다. 이는 키키의 이야기에서 발견되던 작가의 모습, 나의 모습의 또 다른 버전이기도 하다.
이렇게 키키의 이야기는 글로 기록되고, 나와 타자가 만나는 거울과 유리 위에 새겨지거나, 수많은 키키들로 분열되어 각자의 무대에서 상황과 정서를 재현해내고 있다. 때로는 추상적 기호들로 약호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다른 오브제들의 나열로 나타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다양한 모습의 키키들이 내는 작고 낮은 목소리들은 더 이상 작가만의 내밀한 독백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목소리들의 어울림은 서로 다른 선율을 내는 노래에 가깝고, 이 노래 소리는 미약하지만 멈춤이 없이 계속되므로, 열린 창틀 사이로 빠져나가 타인에게 닿는, 세상으로 향하는 노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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