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고독
김해리_아트인컬처 기자
저는 말입니다, 아마추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그 말만 들으면 뭐든 용인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죠. 그러니까 아마추어 코미디언이건 아마추어 세탁원이건 아마추어를 붙여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사람들 있잖습니까, 삶에서건 죽음에서건 프로가 되지 못하는 이런 사람들이 수많은 구멍들, 언제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출구와 입구를 많이 만들어 놓고서 말입니다, 자신의 고독이건 타인의 고독이건 쓰윽 들어갔다가 쓰윽 빠져나오기도 하면서 세계를 넓혀 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박지영, 『고독사 워크숍』, 민음사, 2022, p. 115.
1.
어린 시절의 일기가 처음부터 선생님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쓴 의무 방어용 과제라면, 성인의 일기는 망언과 실언을 두서없이 쏟아내는 고백록에 가깝다. 별소리만 나열된 탓에 날것의 일기를 노출하는 일은 꽤 복잡한 사안이다. 서정배의 작품은 일기를 토대로 한다. 아니, 일기에서 시작한다. 서정배는 키키라는 페르소나를 상정해 그의 일상을 기록하고 이를 그림과 설치 등으로 번역해 왔다.
만약 키키의 글이 비밀 수첩에만 쓰였다가 남몰래 폐기되어 일기로서의 본분을 지켰다면, 작가의 작업은 혼자만의 소꿉놀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서정배는 차곡차곡 쌓은 기억의 저장고에서 독한 권태를 불러내고 이를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일기가 단지 과거의 자취로 머물지 않고 오늘의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과거와 현재 혹은 현재와 미래의 마찰이 생긴다. 일기에서 떼어낸 문장을 이어 붙여 그린 그림의 시점은 어제인가, 오늘인가, 내일인가? 혼재하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주어를 두 칸 멀리 밀어낸 만큼 서정배는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는 안전거리를 확보한다. 작가는 ‘인칭 게임’을 룰로 삼는다. 그림을 찾아온 방문객을 1인칭의 기억으로 에스코트하기 위해 3인칭의 키키를 안내자로 내보낸다. 여기에 초대된 이는 바로 당신, 곧 2인칭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정배와 키키가 비워둔 ‘당신’의 자리에 앉아 두 도플갱어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비근한 일상의 단면을 공유한다.
다만 일기와 그림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이는 작가가 하루의 일과를 곧이곧대로 받아쓰는 그림일기를 원하진 않는다는 얘기다. 서정배의 작품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일상의 기표들로 채워져 있다. 이모저모를 뜯어보면 그것은 결국 작가의 쿰쿰한 기억 속 파편일 터. 애매하고 모호한 것, 불확실한 것들의 실상은 다름 아닌 기억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서정배의 회화는 주어와 시제가 엉킨 문장이다. 누구나 주어가 될 수 있고, 시점이 언제이든 상관없다. 특히 문법은 아무래도 괜찮다. 외려 작가는 이 물렁한 구조를 통해 당신과 만나는 일에 주력한다. 폐쇄적인 자아처럼 밀실만 맴돌던 일기를 마침내 보편의 ‘심리 지도’로 바꾸어내는 일. 여기에 키키의 역할이 있다. 그렇다면 이 지도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사실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이 지도를 붙들고 헤맨 적이 있다. 키키가 그리는 지도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서정배는 매일매일 꼬박꼬박 성실하게 묻는다. 인간의 우울이란 무엇인가? 삶 전반에 스민 이 묘한 우울감을 당신도 아는가?
2.
모든 인간은 고독사한다.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꼭 붙들고 한날한시에 죽음을 맞더라도 생에서 사로 건너는 일방통행의 건널목은 오롯이 1인용이다. 형언하기 어려운 정조, 사뭇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멜랑콜리는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인간 목숨의 유한성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극단적 절망은 자기 파멸로 귀결되지만, 적절한 우울감은 삶의 근원적 의미를 고찰하는 원동력이 된다. 뭉크의 <절규>와 베이컨의 <비명>이 전자라면, 키키의 독백은 후자다. 그의 우울은 살아 있음을 감각하게 하는 자극, 즉 생의 알리바이다. 이에 관한 세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 겸허한 시간이다. 중증 우울증은 현실 세계의 모든 규칙을 바꾼다. 시간이 빨라졌다가 느려지고 생생한 기억이 퇴색하며 쉬운 단어가 혀에 꽁꽁 묶여 뱉어지지 않는다. 이때의 중증 우울은 현재 속에서 주로 미래의 고통을 예견하며 살게 하는 파괴적인 질병이다. 그런데 작가는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을 명징하게 인식한다. 물리 법칙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일상은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우울을 감지한다. 서정배는 직접 지은 에세이 『검은 담즙』에서 매일 오후 3시의 일과와 상념을 글로 적으며 키키의 ‘지금들’을 기록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때때로 그 순간을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월요일 오후 3시는 그 시간이 속해 있는 때이다.” 그는 2시 59분에서 3시 1분으로 건너뛸 수 없는 시간의 압력에 굴복해야 하는 인간의 무력감을 성토하고 삶이란 원래 피할 수 없어서 지독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멜랑콜리란 버거운 생을 억지로 삼킬 때 울컥 올라오는 쓴 물과 같다. 작가는 이처럼 분비되는 경증 우울의 씁쓸한 맛을 별수 없다는 듯이 키키라는 인물로 읊조리며, 자신이 놓인 시공간의 x/y/z 축과 그것이 끌어당기는 삶의 중력을 묵묵히 견뎌 나간다.
둘째 증거는 끈질긴 숨이다. 키키의 일기를 파편화한 그림을 들여다보자. 그녀 또는 그녀들은 주로 방에 있으며 숲이나 도로를 거닐기도 한다. 서정배의 회화작품은 추리 소설의 무대가 될 법한 음습한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종종 여기엔 매캐한 담배 연기인지 시린 입김인지 모를 숨이 피어오르는데, 그 미상의 기체는 키키의 머리맡에서 솟아오르기도 하고 키키나 다른 사람의 입으로 흘러 들어가기도 한다. 마치 숨결로 타인의 존재를 더듬더듬 확인이라도 하듯이. 또한 그림엔 나무가 단골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그 줄기와 뿌리가 입에서 나온 공기만큼이나 구불거린다. 이 나무는 인간을 숨 쉬게 하는 산소의 원천이자 스스로 호흡하는 생물이다. 유난히 긴 나뭇가지가 나부끼는 키키의 공간에는 인간 및 식물의 들숨과 날숨의 기척이 가득하다. 삶은 숨을 들이쉬며 시작되고 숨을 내쉬며 끝난다. 한 인간을 잠식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흩어지는 숨, 과거에서 미래로 전해지는 숨, 이 숨들이 쌓여 역사가 된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자동으로 입안을 들락날락하는 숨은 생의 출발 신호다. 서정배는 키키의 일기들에 기다랗게 이어지는 호흡의 모티프를 그려 넣고, 어디선가 맥박처럼 뛰고 있을 생명력의 흔적을 내보인다.
셋째 증거는 투명한 블루(blue)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바다를 보면 인간의 공허와 쇠약이 떠오른다. 블루는 심리를 표상(表象)한다. 우울, 비애, 불안의 정서가 침잠해 있는 심연의 색이다. 또 블루는 과거나 미래, 꿈이나 희망 혹은 그리움이나 고독, 아니면 갑자기 들이닥친 아픔과 상처의 기억을 자극한다. 서정배는 파란색을 너무 투명해서 쉽게 상처 날 것 같은 살갗처럼 사용한다. 키키의 시공간은 예민하고 얇은 피부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사에서 우울의 정서는 대개 처절한 고통과 찢긴 육신을 뭉쳐둔 듯한 두꺼운 마티에르로 표현돼 왔다. 악에 받쳐 저질러버린 자해처럼, 많은 예술가가 견딜 수 없는 실존적 고통을 캔버스 위에 난도질해 왔다. 비관밖에 남지 않은 폭발적인 감정을 거친 붓질로 터트리고 끈적이는 물감에 쏟아냈다. 그러나 서정배의 회화는 어쩐지 맑고 투명하다. 느슨한 미립자로 이뤄진 듯 보이는 그의 블루는 물에 닿으면 하얗게 녹을 것만 같다. 검푸른색에서도 올라오는 개운한 투명도. 어쩌면 그의 멜랑콜리는 수용성일지 모른다. 일순간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들지만 제법 괜찮은 식사와 따뜻한 샤워에 녹일 수 있는 우울. 그러나 언제라도 다시 찾아오는 만성적인 싫증 말이다. 그렇게 작가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떼려야 뗄 수 없고, 도망갈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하는 멜랑콜리에 대응하며 살아가자고, 이따금 블루를 기분 좋게 녹일 수 있을 거라고 위로를 건넨다.
우울은 심리적 재난이다. 운 좋게 면한 사람도 있다지만, 언제 어디서고 그냥 닥쳐올 수도 있는 재난.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복구할 수도 있고 예방할 수도 있지만, 막상 다시 삶을 덮치면 그저 휩쓸리고 마는 것. 우리 인간은 죽는 날까지 고되다. 삶에 있어서는 영원히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다. 서정배는 지독하게 앓으면 전부를 잃을 수도 있는 심리적 재난에 앞서 멜랑콜리로 안전 훈련을 하는 듯하다. 마치 고독과 소외로 쓱 들어갔다가 쓱 빠져나오고 비틀비틀 삶이라는 길을 걸어 나가는 준프로로 거듭나려는 듯이. 생의 어두운 순간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것과 꾸준히 격투하고 조금씩 포용하는 작가는 성실한 멜랑콜리커다. 흡사 우울과 무사히 그리고 끝까지 공생하기를 목표로 삼은 고독의 사육사 같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오늘을 ‘오늘’이라고 느끼고, 인지할 수 있었던, ‘완벽한’ 하루라는 생각을 그녀는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