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임은신 (도로시 대표 / 큐레이터)

서정배 SEO Jeong-Bae는 키키 kiki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그녀’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작업을 한다. 키키의 이야기는 텍스트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조형예술가인 서정배의 손을 통해 드로잉으로, 회화로, 오브제로, 또 설치로 표현되고 완성된다. 키키라는 이름은 짐작할 수 있듯 우리가 웃을 때 내는 “큭큭” 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큭큭, 킥킥 잘 웃는 그녀의 모습을 의성화 하면서 의태화 시킨 이름 키키. 그녀의 이름만 들으면 그녀는 아마도 잘 웃는, 잘 키득거리는 쾌활한 인물인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 그녀의 이야기는 킥킥거릴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키키의 이야기를 묶어 놓은 텍스트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양에서 우울을 상징하는, 우울의 근원이 된다는 검은 담즙 La bile noire, 멜랑콜리 Mélancolie이다. 그리고 <검은 담즙>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키키의 이야기는 공허하고 외롭고 멜랑콜리하다고 입을 모은다. 키키가 멜랑콜리한, 우울한 인물이라는 것은 작가의 조형작업들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난다. 때로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는것 같기도 하지만 보통은 무표정한 얼굴의 키키는 무언가 서글프고, 불안하며, 때로는 괴기스럽다. 서정배가 2009년 긴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십 여년에 걸쳐 발표한 작품들과 그에 대한 평론들을 읽고 있노라면 ‘멜랑콜리’와 ‘우울’의 향연이다. 그녀의 작업을 도로시에서 소개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 동료기획자는 괜찮겠냐며 서정배의 작업이 “재미있고 흥미롭지만” 좀 “세지” 않냐고 조심스럽게 걱정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의 작업은 “세다”. 이번에 소개하는 <블루이쉬 랩소디 Bluish Rhapsody>의 메인 작품인 쉬지 않는 노래 Never Stopping Song – My Bluish Rhapsody (2018) 역시 그렇다. 대형 캔버스천(143x230cm) 위에서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 – 노래에는 푸른 심연에 빠져 떠내려가는 키키가 있고, 소영돌이 안으로 거꾸로 머리를 박고 자맥질을 하고 있는, 두 다리만 보이는 키키가 있는가 하면, 여유롭게 물 위를 부유하는 키키가 있으며, 또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키키가 있다. 웅크린 키키를 남몰래 지켜보는 낯선 그도 있고, 여기 저기로 뻗치는, 내 것인지 혹은 키키의 것인지 혹은 어떤 또 다른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는 손들이 있으며, 땅 위로 뿌리가 드러난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있다. 첫눈에 결코 밝다고는 이야기하기 힘든 이미지들이다. 결국 작가는 이번에도 변함없이 우울을, 멜랑콜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하물며, ‘푸르스름한 광시곡’ 정도로 직역되는 이번 전시의 제목 <블루이쉬 랩소디>는 언뜻 보면 차가운 우울과 광기로 가득한 느낌이다. 과연 이번 작업에서 키키가, 서정배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어떤 온도로 느끼면 되는 것일까.

서정배는 거의 매번 텍스트(글) 작업과 조형작업을 병행한다. 조형예술가가 풀어내는 글들은 때로는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고, 또 때로는 작품 이해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텍스트는 1차적인 이해를 돕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면 어떤 형식으로든 설명적이 되는 텍스트는 이것이 만드는 프레임 안에 갇혀 조형작업에 대한 자유롭고 주관적인 해석과 감상을 방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정배의 검은 담즙 La bile noire은 그의 조형작업을 감상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조형작업을 하는 그가 굳이 텍스트 작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키키의 일기장이라고, 또 혹자는 키키가 연기하는 연극 혹은 소설이라고 이해한 검은 담즙은 서정배가 키키를 통해 풀어내는 여러 다양한 형식의 ‘서사시’ 중의 하나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쉬지 않는 노래’, 즉 랩소디 Rhapsody이다. 랩소디는 원래 ‘서사시의 한 부분’, 또는 ‘계속적으로 불리는 서사시적 부분의 연속’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로, 서양 고전 음악에서 ‘형식 및/혹은 내용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환상곡품의 기악곡’을 뜻하며, 우리말로는 ‘광시곡狂詩曲’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우리에게 친숙한 랩소디는 서양고전음악으로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Hungarian Rhapsody, 그리고 대중음악에서는 영국 락그룹 퀸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sody, 그리고 그 제목은 몰랐을지라도 우리에게 익숙한 선율인, 재즈의 거장 조지 거슈윈 George Gershwin이 1920년대 뉴욕에서 발표한 랩소디 인 블루 Rhapsody in Blue정도일 것이다. 세 노래를 모두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랩소디는 랩소디이니까. 클래식 – 팝 (락) – 재즈로, 기본이 되는 형식은 다를지라도 랩소디만이 가지는 그 어떤 정서가 세 곡 중 하나만 안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느껴지니 말이다. 자유로운 듯 몽환적인 듯 서글픈 듯 우울한 듯 그러면서도 무언지 모를 감미로움. 서정배의 <블루이쉬 랩소디>는, 키키의 검은 담즙은, 그들의 조형적 서사시는 이런 느낌의 세 랩소디 곡의 선율 안에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그러나 가끔 작은 바위들에 부딪혀 작은 파장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또 반복되고 있다.

키키의 이야기는 작가가 겪은 일을 기반으로 적어 내린 논픽션이면서, 또한 한편으로 작가 자신이 아닌 타자, 제3자 키키의 시선에서 느끼고 바라보며 적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주관적인 감정과 시선을 가능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한 걸음 물러서 적으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가상이 되는, 허구가 되는 일종의 픽션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다른 여러 평론가와 기획자가 서정배의 키키가 읖조리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작가의 ‘개인적 상징’과 ‘개인적 서사’에 기반한 우울과 멜랑콜리를 느끼고 있는 반면, 나는 검은 담즙을 읽으면서 그 담담하고 담백한 어조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상징’과 ‘나의 서사’를 찾아 따라가고 있었다. 더불어 나는 이 텍스트를 읽으며 우울하지도, 멜랑콜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갑고, 익숙하고 따스했다. 서정배가 키키의 입을 통해 서술하는 이야기들은 파리에서, 그러니까 국외에서 장기간 체류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만한 꽤 보편적인 경험이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특별한 감정 표현 없이 일어났던 사실만을 기술하고 있을지라도, 검은 담즙은 충분히 공허하고 멜랑콜리하다. 외국인으로서, 공부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 홀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유학생으로서 겪었던, 겪고 있는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특별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조금은 혹은 꽤나 외로왔던 일상을 담담히 적어내린 키키의 이야기, 검은 담즙. 이는 그 어떤 클라이막스도, 흥분도, 환희도 없는, 분명히 유쾌함을 유발하는 노란 담즙(황담즙, bile jaune) 보다는 우울함을 유발하는 검은 담즙(흑담즙, bile noire)으로 가득한, 단조롭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으로 가득한, 그래서 멜랑콜리한 느낌으로 가득한 서사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키키가 읖조리는 서사의 배경은 더이상 파리가 아니다. 키키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어야 하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키키가 읖조리는 서사의 톤은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키키의 일상은 특별할 것 없고, 단조롭고, 담담하다. 그러면서 공허하다. 그리고 외롭다. 여전히 그는 위대한 혼자이다. 그리고 키키는 그냥 여전히 흘러가는 시간을 느낀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우울과 멜랑콜리, 검은 담즙으로 가득한 멜랑콜리이어야 할 것이다.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평범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평범한 서사를 읽으며 그러나 나는 우울과 공허보다는 노스탈지와 아련함을 느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단조롭고 외로왔지만, 지나온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읖조리는 키키의 이야기는 그 단조로움과 외로움마저도 그리워지게 만드는, 지나온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라는 노스탈지아적인 그 어떤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 시절을 겪었던 유학생 출신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면서, 무엇보다도 지금의 내가 괜찮기 때문에, 잘 지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감정이다.

서정배의 작업 중에는, 텍스트 작업이든 조형 작업이든 부정적인 단어와 문장들이 제법 등장한다. “나를 싫어한다 Je me déteste” “I’m Wrong 내가 틀렸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기형도의 시 비가2-붉은 달 중)”… 그런데 그의 블루이쉬 랩소디를 보다 보면, 이 문장들이 부정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내리기 어려운 어떤 자극이나 긍정으로 바뀌어 느껴진다. 언뜻 보았을 때 공허하고 조금은 그로테스크하고 불안으로 가득한 것 같았던 서정배의 그림들은 오히려 키키가 텍스트로 읖조리는 검은 담즙 이야기를, 블루이쉬 랩소디를 들으면서, 읽으면서, 오히려 차분하고 따뜻해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서정배의 ‘블루이쉬’ 랩소디는 언뜻 보았을 때 느껴지는 우울하고 차가운 블루와는 다른 의미의 푸른빛이 아닐까.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키키의 시선과 목소리를 빌려 온 것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타자화를 통하여, 다시 말해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일상을 바라보고 기록하면서 감정이 차분해지고 담담해지면서 현실을 보다 분명하게, 나아가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담즙 안에 한없이 빠져 있을 때에는 그것이 검은 색인지, 노란 색인지 혹은 파란 색인지 정확히 보고 느낄 수 없지만, 한 걸음 물러나 보면, 시간이 흐르고 다른 일들을 겪고 난 후 조금의 거리를 두고 보면, 검은 색인 줄 알았던 그 담즙은  어느 틈에 노란 색으로 변해 있기 마련인 듯 하다. 힘겨웠던 일들도, 멜랑콜리와 우울도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두고 보면 괜찮아진다는 메세지는 결국 그의 쉬지 않는 노래 블루이쉬 랩소디를 차분히 그리고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Don’t Worry걱정하지 마라”, “I’m Not Wrong나는 틀리지 않았”으며, “I’m Fine” 나는 괜찮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혼자”가 아니던가. 혼자라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이면서 위대한, 그런 혼자 말이다.

이 메세지는 서정배가 이번 전시를 위해 준비한 오디세이 호텔 방을 소재로 하는 위대한 혼자 시리즈 회화와 드로잉, 그리고 텍스트를 통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검은 담즙 #48에서 보여졌던 어떤 불안과 외로움은 #60 쉬지 않는 노래 편의 #그 때 그 방, 606호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외롭고 불안했던 유학시절,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내 자리를 찾지 못해 불안했던 귀국 초기 시절에 겪었던 그 공간이, 쓸쓸하고 우울하고 고독하게만 느껴졌던 그 공간이,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외로움과 불안이 해소되기 시작한 지금, 이제는 오히려 익숙하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서정배가 우리 앞에 늘어 놓는 위대한 혼자 시리즈의 607호, 305호, 606호, 705호는 더 이상 공허하고 외로운 혼자만의 방이 아니라, 따뜻하고 편안한 위대한 나 혼자를 위한 가득한 방이다. 그렇게 그의 청색 시대 My Bluish Period(2016)는 슬픔 가득하고 쓸쓸했던 파리 체류 초기의 청색시대에서, 곧 장미시대를 거쳐 입체주의를 꽃피울 피카소 Pablo Picasso처럼,  맑고 푸르게 피어오를 서정배의 새로운 시대를, 청명한 푸른 빛으로 밝게 빛날 환상의 감미로운 블루이쉬 랩소디를 예고하고 있다.  

bottom of page